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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 List }
DISC 1
1. Dangerous Dave
2. Van Allen's Belt
3. Runaway
4. Grandad
5. Wings Of Thunder
6. World's Eyes
7. Don't Let It Get You
8. Disraeli's Problem
9. A Canterbury Tale
{ COMMENT }
수년 전 한 겨울날, 창가에 뽀얀 김이 서려 있는 단골 레코드점에서 SPIROGYRA의 앨범을 처음 접하였을 때의 일을 필자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느 때와 같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CD를 검색하던 중 눈에 확 띄는 커버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필자는 아트록에서 눈을 돌려 재즈나 펑크록을 기웃거리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어쩌면 이 작품은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초록빛 아름다운 커버의 상단에는 큰 대문자로 "SPIROGYRA"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었고 갑자기 가슴은 마구 진동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필자는 그들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상태였고 단지 이전의 카다로그에서 시커멓게 인쇄된 커버 사진, 그리고 브리티쉬 포크록이라는 설명만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포크 록은 필자의 취향과 매우 거리가 먼 장르였지만 커버를 통해 요즘의 문화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아우라(AURA)가 진하게 다가오는 그 작품을 필자는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세 번째 앨범인 [Bells Boots And Shambles]였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지금 필자는 이 자리에서 그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당시 그 작품에서 필자가 어떠한 충격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길게 쓰지 않겠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필자의 인생항로는 약간 수정되었을 것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취향이 따로 있을 것이고 아트록이라는 한 장르에 국한시키더라도 각 분야에 대한 자신의 경제및 시간의 투자 정도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평론가가 ‘걸작’이니 ‘명반’이니 하는 많은 작품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고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소위 ‘걸작’은 매우 보기 드문 예외에 속한다. 하지만 SPIROGYRA의 작품은 그 예외중 하나이다.
세계의 어느 평론을 보더라도 이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항상 "마스터피스"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고 각국의 컬렉터들은 이들의 음반을 소장하기 위해 지금도 혈안이 되어 있다. 특히 그들의 3집과 같은 경우 300파운드를 초과하는 고가임을 떠나 일단 음반 시장에서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카리스마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심지어 아방가르드 록을 연주하는 필자의 일본인 친구도 이들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비트나 텐션을 강조하는 필자에게 있어서도 포크음악이라는 장르는 통기타나 튕기며 중얼거리는 나른한 음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의 작품을 듣고서 그러한 생각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크의 새로운 물결’ 혹은 ‘로맨틱포크’라는 평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의 음악은 분명 이전의 포크 록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마치 일반적인 심포닉록과 같은 도입-전개-결말의 치밀한 곡구성, 그리고 상승과 하강 혹은 강약이 뚜렷한 전개, 당시 일반적인 아트록이나 팝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리듬, 그리고 구상처리와 여러 이펙트의 사용등으로 인해 이들을 포크록 그룹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오히려 포크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아트록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마도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것으로 생각된다.
SPIROGYRA가 Martin Cockerham이라는 탁월한 작곡가에 의해 결성된 해는 1970년으로 당시 영국은 이미 아트록이라는 장르가 최전성기에 달하였을 무렵이었다. 아트스쿨을 비롯한 대학의 지적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예술적 감각과 사상을 록이라는 육체적 음악에 투영시키고 이러한 음악은 클럽을 중심으로 전염병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68년이 학생운동과 기성에 대한 급진적 도전(반전, 반자본주의, 반문명)의 물결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지나간 당시, 정치적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인본주의에 대한 향수와 상업주의에 대한 혐오, 그리고 희랍문화에 대한 동경은 록음악에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기존의 록, 재즈, 포크 그리고 클래식이라는 단세포적인 구분을 거부하면서 어떤 방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짧은 시간의 음악에 다양하게 표출할 수 있으며 타자에게 쉽게 공감되고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당시 젊은 록 음악인의 공통된 과제였다.
아마도 Martin Cockerham도 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땅의 목소리’('천상의 목소리’가 아님에 주의!)를 가진 여성 보컬리스트 그는 가장 아름다운 ‘땅의 목소리’('천상의 목소리’가 아님에 주의!)를 가진 여성 보컬리스트 Barbara Gaskin, 그리고 Steve Borrill, Julian Cusack과 함께 SPIROGYRA를 결성하여 대학가와 클럽을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펼치고 1971년 B&C레이블을 통해 그들의 데뷔앨범인 [St. Radigunds]를 발표한다.
그들의 작품 중 가장 어쿠스틱한 것이며 내용 면에서는 중세의 기괴한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Julian Cusack의 바이올린이다. Curved Air의 Darryl Way와는 또 다른 소리를 들려주는 그의 연주는 공격적이고 거친 Darryl Way의 연주에 비해 수동적이고 섬세하지만 한편으로 섬뜩한 광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광기의 느낌은 다른 아트록 계열의 어떤 바이올린 연주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그 소리가 마치 가슴과 머리에 비수처럼 박히는 듯한, 독특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 이후 그들은 Mark Francis(Vocal, Guitar, Organ, Piano)를 정식 멤버를 기용하여 본작인 두 번째 앨범 [Old Boot Wine]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리듬파트의 강화이다.
첫 번째 작품에서는 Dave Mattacks의 드럼연주가 단지 보조적인 역할에 그친 반면 이 작품에서는 당당히 메인 파트를 점령하고 있다. 따라서 좀더 어쿠스틱한 분위기를 기대한 국내의 청자에게는 1집이나 3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호응을 얻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분들에게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의 세 작품은 단지 그 색채가 약간씩 다른 것 일뿐, 작품의 수준이나 완성도 는 거의 동일한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다.
1집이 가지는 광기의 기괴한 매력과 트래드적인 요소, 그리고 3집의 경이로울 정도의 빈틈없는 앙상블은 필자 같은 凡人에게는 친근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작품의 수준과 친근감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이 작품은 다정다감하고 정겨운 목소리, 그리고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연주로 가득 차 있어 쉽게 친해지기에 부담이 없는 작품이다. 만약 1집은 가을에, 그리고 3집은 겨울에 들으라고 권한다면 본작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따뜻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쾌한 드럼과 기타의 선율로 전개되는 'Dangerous Dave'.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하여 매우 밝고 흥겨운 이 곡에서의 약간의 당혹감은 이윽고 갑자기 전개되는 'Van Allen’s Belt'로 인해 안도감으로 바뀐다. 피아노 연주와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친근하면서도 애상으로 가득 찬 Martin Cockerham의 목소리에 우리의 상처받은 가슴은 위로 받을 수 있다. 이전과 같이 광기로 가득 찬 목소리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짧고 아름다운 곡으로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곡이다.
세 번째 곡이자 이 앨범 중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서 가장 큰사랑을 받은 'Runaway', 그리고 중반부의 바이올린 독주와 첼로 연주가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Grandad'에 이르면 도대체 이 작품이 왜 1집과 3집에 비해 호응을 받지 못하는가가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더 매력적인 작품인데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앨범의 가장 훌륭한 곡으로 추천하고 싶은 곡은 'World’s Eyes'이다.
아마도 텐션이 강한 작품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이 곡은 커다란 만족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반복되는 Martin의 보컬과 Barbara의 조용한 스켓이 서서히 긴장을 고조시키고 이윽고 터져 나오는 비트. 그 강한 비트와 상승하는 보컬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포크록이라기보다는 르네상스적인 아트록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어서 흥분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Don’t Let It Get You', 다분히 팝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 따뜻한 기운이 방안 가득 차는 'Disraeli’s Problem', 그리고 차분한 Barbara의 스켓이 강한 여운을 남기는 'A Canterbury Tale'로 이 앨범은 아쉬운 이별을 고한다.
외치고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친근한 목소리, 그리고 풍부한 감성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은 그 아름다운 커버아트와 함께 아마도 많은 애호가들의 소중한 소장품이 될 것이다. 한가지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필자의 경우 이들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과 흥분을 다시 느끼기 위하여 지금까지도 이에 비견될만한 작품을 계속 찾아 헤매고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경제와 시간의 손실을 더 이상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처음 이들의 작품을 접하는 여러분들이 부러울 뿐이다. 진심이다.
글/전정기
자료제공/시완레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