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MMENT }
찰리 헤이든- 열정에서 관조의 세계로... 재즈의 미학을 설파하는 영원한 베이스 맨, 찰리 헤이든
전설이 되어버린 89년 몬트리얼 테입.
재즈를 위해 태어난 영원한 베이스 맨 찰리 헤이든.
음악계 전반을 보면, 마치 음악을 위해 태어난 듯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불후의 모차르트가 그렇고, 어릴 때부터 무대에 선 마이클 잭슨도 그렇고, 이번에 언급할 찰리 헤이든 역시 그 범주에 속한다. 이런 인물들은 마치 처음부터 음악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 때문에 후천적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뭔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을 갖고 있다. 하지만 초등학생도 모차르트의 이름을 알고, 지금은 스캔들 메이커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한때 지구촌을 흔들었던 마이클 잭슨인 반면, 희한하게도 근 50년 이상 재즈 씬에 종사했고, 다채로운 실험의 선봉에 섰던 찰리 헤이든의 존재감은 그리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재즈에서 베이스라는 악기가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기도 하고, 같이 일했던 오네트 콜맨이나 돈 체리 등이 명성의 상당 부분을 앗아간 탓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팻 메스니나 행크 존스 등과 벌인 역사적인 듀오 앨범도 모두 그들의 업적으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아마 재즈 역사상 가장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베이스 주자로 찰리 헤이든을 꼽는 데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긴 경력을 자랑하는 레이 브라운이 있지만, 그는 철저하게 메인 스트림 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면에서 찰리 헤이든과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찰리 헤이든은 태생부터가 음악인이었다. 태어난 곳이 미국 중부의 쉐난도어라는 소도시지만, 그 집안 전체가 음악 패밀리였던 만큼 뱃속에서부터 음악과 살았다. 이 가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컨츄리 & 웨스턴을 주로 하던 카터 패밀리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이 가족은 카터 패밀리와도 친분이 두터워 함께 공연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찰리는 생후 22개월이 되던 때 이미 가족과 함께 무대에 섰다고 한다. 워낙 극성스런 가족들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가 아기일 때 엄마가 불러준 자장가를 자주 흥얼거렸고, 그러자 이 아이도 음악 센스가 있구나 탄복한 가족들이 본격적으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 즈음 그들은 스프링필드로 이사해서 본격적인 쇼 비즈니스 생활을 시작했으므로, 찰리도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서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웃음도 지어보이는 일을 해야 했다. 가족이 모두 그러니 자기라고 빠질 수는 없었으리라. 어쨌든 지금의 찰리는 매우 지적인 외모에 고도의 내면적인 음악을 지향할 뿐 아니라 좌파 성향도 강한 사람이다. 이런 현재의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과거 그가 딴따라로 커왔던 어린 시절을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찰리가 15살이 되었을 무렵 갑자기 병에 걸려 성대도 망가지고, 얼굴도 흉한 꼴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래서 본의 아니게 은퇴를 했지만, 음악만은 버릴 수 없었다. 이때부터 베이스를 본격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타고난 혈통이 혈통인지라 금새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1955년 무렵에는 스프링필드의 지방 TV 쇼에 악단 멤버로 정규적으로 출연할 정도가 된다. 당시 그 쇼의 호스트는 레드 폴리라는 사람으로, 컨츄리 & 웨스턴의 B급 스타중 한 명이었다. 그가 가볍게 멘트도 날리고, 초대 가수도 부르고 하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에 악단 멤버로 나왔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런 한심한 쇼에 계속 남아있기엔 찰리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다. 결국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그는 L.A.로 향한다. 여기서 금새 눈에 띠어 곧 엘모 호프, 아트 페퍼, 햄프턴 호즈 등과 연주할 실력자로 부상한다. 그런 와중에 힐크레스트 클럽에서 연주하고 있던 폴 블레이와 친분을 맺게 되고, 여기서 그의 소개로 오네트 콜맨을 알게 된다. 참으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오네트는 제리 멀리건 밴드의 일원으로 L.A.의 한 나이트 클럽에 출연하고 있었다. 그 공연을 찰리가 구경하게 되었는데, 워낙 튀는 연주의 오네트인지라 이내 제리에게 해고되지만, 그 연주가 갖고 있는 원시적인 에너지와 약동감을 찰리는 놓치지 않았다. 여태 한번도 접한 적인 없는 스타일이었지만, 그의 귀는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찰리는 오네트와 함께 그룹 멤버가 되어 뉴욕에 진출, 프리 재즈의 선봉장이 된것이다.
사실 이 정도 경력만으로도 찰리의 이름은 재즈사에 남을 만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실험을 계속했다. 아치 셉, 로스웰 러드 등 프리 재즈에서도 강성이라 부를 만한 연주인들과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밴드 를 조직, 좌파 성향의 재즈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메인 스트림의 뮤지션들을 만나면 지극히 정상적인 표정으로 스윙감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에게 모든 음악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공기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냥 호흡하면 되니까. 그는 재즈계에서 많은 일을 했다. 전위적인 프리 재즈부터 칼아츠에서 재즈 강좌를 개설한 교수로서의 풍모까지 비록 마일즈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처럼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뮤지션으로서 응당 해야할 일은 모두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1989년에, 10회째를 맞이한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측에서 그에게 헌정하는 이벤트를 벌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찌 보면 같은 베이스 주자로서 스코트 라파로나 폴 챔버스, 자코 파스토리우스 등이 20대 시절에 일찍 주목을 받은 것에 비쳐볼 때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 페스티벌을 통해 그의 음악 세계가 제대로 정리되었다는 면에서는 행운아라고 할 수도 있다. 요절은 전설이 되지만, 이런 식의 장수는 행복인 것이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 매일 밤.” 그의 짧막한 멘트는 이 모든 이벤트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매일 밤 다른 게스트들이 나와 그가 걸어온 길을 하나씩 되짚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당시의 프로그램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6월 30일 -조 헨더슨 & 앨 포스터
7월 1일 -제리 앨런 & 폴 모션
7월 2일 -돈 체리 & 에드 블랙웰
7월 3일 -곤잘로 루발카바 & 폴 모션
7월 5일 -팻 메스니 & 잭 디조넷
7월 6일 -에그베르토 기스몬티
7월 7일 -폴 블레이 & 폴 모션
7월 8일 -리버레이션 뮤직 오케스트라 (톰 해럴, 켄 맥킨타이어, 어니 와츠,
조 로바노, 제리 앨런, 폴 모션 등)
이 당시의 실황은 라디오 캐나다(Radio-Canada) 방송국에서 녹음한 것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전문적인 음반사가 아닌 일개 방송국에서 이 정도로 정확하고, 깨끗하게 녹음했다는 점은 일단 놀랍기만 하다. 대개의 방송 실황 녹음이 히스와 잡음 투성이인 것을 감안하면 이 점은 매우 다행스럽다. 그리고 이중 일부는 이미 CD로 출시된 바도 있지만, 아직 전작이 다 나온 것은 아니다. 또 최근 유니버설 카탈로그를 보면, 이 시리즈가 하나도 등재되어 있지 않아 곧 폐반이 될 것 같은 예감도 든다. 그런 면에서 이번 라이센싱은 역사적인 의미도 있는 셈이다.
본 음반의 구성은 전형적인 피아노 트리오 포맷이다. 리듬 섹션에 찰리와 폴 모션이 포진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이전에도 많은 공연을 펼친 터라 아마 눈짓만으로도 척척 호흡이 맞았을 것 같다. 야구에서 1번과 2번 타자를 합쳐서 테이블 세터(Table Setter)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밥상을 차려놓는다는 이야기다. 그럼 클린업 트리오에선 젓가락만 들면 되는데, 이렇게 완벽한 테이블 세터가 배후에 있다면 그 앞에선 누가 서건 거저 먹는 격이다. 그런 면에서 피아노를 맡은 곤잘로 루발카바는 기본 점수를 확실히 먹고 들어간 셈이다.
사실 곤잘로와 찰리는 구면이다. 이미 곤잘로가 한참 쿠바에서 날릴 무렵인 86년에 찰리가 직접 하바나를 찾아가서 함께 연주한 적도 있고, 나중에 곤잘로가 쿠바에서 망명, 미국에 왔을 때에도 누구보다 환영한 사람이 찰리였다. 그러므로 이번 이벤트에 그를 초빙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수록곡을 보면 6곡중 3곡이 찰리의 작품이다. 2번 트랙인 “Bay City", 3번 트랙인 ”La Pasionaria", 4번 트랙인 “Silence"가 그것들이다. 필자는 기분 좋게 미디엄 템포로 스윙하면서 곤잘로가 화려하게 비상하는 2번과 3번도 괜찮지만, 찰리의 베이스 솔로가 나오는 4번을 제일 아낀다. 이전까지 리듬 섹션에 머물면서 코드만 짚던 그가 여기서는 멜로디 파트까지 치고 나와 곤잘로의 유려한 프레이즈와 이리저리 얽히면서 매우 복잡한 가운데도 뚜렷하게 각인되는 라인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것이 고도로 테크니컬하게 조성된 프레이즈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서정적이기도 한 점이 좋다. 중간에 들려주는 베이스 솔로는 사변적이면서 치밀한 찰리의 심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계속 뇌리에 남는다.
한편 첫 곡 “Vignette"는 같은 베이스 주자인 개리 피콕의 작품인데, 베이스가 전면에 부각되기보다는 피아니스트의 기량에 전적으로 맡긴 곡이다. 아름답게 펼치는 곤잘로의 솔로 몇 소절만으로도 이미 흡인이 되고, 이어서 리듬 섹션이 가세하면서 영롱하고, 아기자기한 하머니를 엮어내면 금새 포로가 되고 만다. 음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써서 적절하게 밸런스를 잡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올 정도다. 또 곤잘로의 존재를 세계적으로 알린 "The Blessing"은 원래 드러머의 돌진하는 듯한 약동감 넘치는 연주가 부각되어 있는데, 여기서 폴 모션은 점잖게 뒤로 빼면서도 절대로 한가하게 스윙하지 않는다. 곤잘로의 질주를 맞춰주면서도 중간중간 엑센트를 주며 활기차게 이끌어가는 부분은 역시 노대가다운 솜씨라 탄복하게 된다. 컨템포러리 재즈가 대부분 기교에 치중한 나머지 듣는 재미라던가, 뭔가 가슴에 남는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음반은 정말로 지성적인 재즈가 무엇인지, 3인만으로도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꽉 찬 사운드의 치밀함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한다. 마치 콘서트에 온 것처럼 숨을 죽이고 세 명인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경연하는 모습을 듣는 것은 잔잔하게 진행되면서도 언제 섬뜩한 장면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서스펜스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을 준다. 그러다 멤버 하나가 돌출해서 솔로를 펼치거나 탄성을 자아내는 라인을 연주할 때엔 뭔가 탁 트이는 듯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정말로 빌 에반스, 키스 재릿 등 트리오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연주인들의 음반 못지 않은 이 앨범이 정식으로 라이센싱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고, 앞으로 이 페스티벌 시리즈가 차곡차곡 모두 출시되었으면 하는 욕심도 부려보게 한다.